영화 선셋대로(Sunset Blvd., 1950)는 할리우드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숨김없이 드러낸 작품입니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노마 데스몬드와 무명작가 조 길리스의 만남을 통해, 영화는 성공 이후의 몰락과 꿈을 소비하는 할리우드의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스타와 관객, 그리고 영화 산업 자체를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몰락한 스타, 잊혀진 영광
'선셋대로'를 처음 보면 가장 강하게 남는 인물은 단연 노마 데스몬드입니다. 한때는 무성영화 시대를 풍미했던 대스타였지만,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의 그녀는 세상과 단절된 저택에 홀로 남아 과거의 영광만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이 설정만 봐도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으신가요. 우리는 모두 한 번쯤 “내가 가장 빛나던 순간”을 떠올리며 지금 내 모습과 비교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노마는 그 감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과거는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입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여전히 카메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오래된 팬레터를 소중히 간직하며 아직도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모습이 단순히 허영심 강한 노인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속사정을 알고 나면 씁쓸해집니다. 노마는 스스로 몰락했다기보다, 시대의 변화에 어쩔 수 없이 밀려난 인물에 가깝습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배우들이 설 자리를 잃었고, 노마 역시 그 변화의 희생자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가 집 안에서 상영하는 옛 영화 장면과 과장된 제스처, 연극적인 말투를 통해 관객이 자연스럽게 눈치채게 만듭니다.
노마를 보며 불편함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슬프고, 자기중심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외롭습니다. 그녀가 끊임없이 “나는 아직도 스타야”라고 외치는 건, 사실 “나를 잊지 말아줘”라는 절규처럼 들립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라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노마는 그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망가져 갔을 뿐입니다. 이 영화가 시간이 지나도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노마 데스몬드라는 인물이 특정 시대의 배우를 넘어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도 충분히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소비하는 도시, 할리우드
'선셋대로'의 또 다른 주인공은 사실 인물보다 공간, 바로 할리우드입니다. 영화 속 할리우드는 화려한 꿈의 공장이 아니라, 꿈을 만들어 쓰고 버리는 냉정한 시스템으로 묘사됩니다. 조 길리스는 이 도시의 현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성공한 작가를 꿈꾸며 할리우드에 왔지만, 실제로는 생활비에 쫓기며 시나리오를 팔기 위해 발버둥 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마냥 아름다울 것 같은 할리우드의 환상과는 정 반대의 팍팍한 현실을 그대로 느끼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조는 노마의 저택에 들어가면서 물질적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 대가로 자유와 자존심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이 관계를 보고 있으면, 할리우드가 개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꿈을 이루고 싶다면, 네가 가진 것을 내놔라.” 돈일 수도 있고, 젊음일 수도 있고, 때로는 존엄일 수도 있습니다. 조는 노마의 각본을 고쳐주며 점점 그녀의 세계에 종속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명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잠깐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태가 되죠. 당장은 편해 보여서 선택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이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선택인 셈입니다.
영화는 할리우드를 악마처럼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매우 냉정한 도시로 그립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안겨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습니다. 노마가 과거의 스타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돈이 되고, 지금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느냐가 전부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1950년이든, 2026년이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지닌 핵심적인 특징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유행이 빠르게 바뀌고, 어제의 스타가 오늘은 구닥다리가 되는 현실말입니다.
카메라 뒤의 진실, 환상과 현실의 충돌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영화가 영화 산업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 카메라가 바깥을 찍는 동시에 안쪽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노마 데스몬드는 스스로를 항상 카메라 앞에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녀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이미 차갑고 객관적입니다. 이 차이가 바로 영화가 말하고 싶은 ‘환상과 현실의 충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마에게 영화는 사랑이었고 인생이었지만,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그녀를 이미 버렸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노마의 연기가 점점 더 과장되고 연극적으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이건 배우의 과장스러운 연기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현실과의 연결이 끊어진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를 연출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진짜 카메라가 아니라,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 길리스 역시 완전히 현실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노마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비슷한 선택을 반복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노마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고 조는 그 환상을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이 대비를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은근히 질문을 던집니다. 환상에 빠진 사람이 더 불행한가요, 아니면 그 환상을 알면서도 이용하는 사람이 더 냉혹한가요.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선셋대로'는 단순한 비극이나 스릴러가 아닙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잔인함과 매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카메라는 사람을 빛나게도 만들고, 철저히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보여주며, 관객에게 선택권을 넘깁니다. 이 환상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빠져들 것인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스크린 속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스크린 밖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