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에 개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단순한 전쟁 영화가 아닙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한 인물이 어떻게 영웅으로 만들어지고, 동시에 그 영웅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장대한 스케일로 보여줍니다. 광활한 사막과 침묵에 가까운 연출은 로렌스라는 인물의 내면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전쟁의 승패보다 인간과 권력,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영웅 서사의 외형을 빌려 제국주의의 본질과 개인의 내적 균열을 탐구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탄생한 영웅
영화의 전반부에서 로렌스는 아직 영웅이라 부르기 어려운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는 영국군 내부에서도 다소 괴짜처럼 보이며, 명확한 권력이나 지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막이라는 극단적인 공간은 로렌스를 빠르게 변화시키는 무대가 됩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사막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시험하는 장소로 설정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풍경 속에서 로렌스는 기존의 군사적 질서나 규율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성장합니다.
아카바 공격 장면은 이러한 영웅 탄생의 핵심적인 순간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로렌스는 아랍인들 사이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됩니다. 이때 중요한 점은, 그의 영웅성이 철저히 ‘상황’과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로렌스 자신도 처음에는 이 역할을 즐기며, 흰 아랍 복장을 입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됩니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보통 인간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더 큰 책임감을 갖게 되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합니다. 로렌스는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점점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게 됩니다. 문제는 이 순간부터입니다. 그는 타인을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웅 로렌스’라는 모습에 점점 취해 갑니다. 다시 말해, 영웅이 되는 과정이 인간 내면이 성장하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위험한 길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승리와 찬사는 로렌스에게 자신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믿기 시작했고, 폭력조차도 ‘위대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정당화합니다. 이때 이미 그의 내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찬란한 영웅이 탄생했지만, 그 속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막에서 태어난 이 영웅은 처음부터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와 개인의 이상
이 영화에서 제국주의는 노골적인 악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국 제국의 논리는 매우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로렌스는 아랍의 독립이라는 이상을 진심으로 믿고 행동하지만, 영국 고위 장교들에게 중동은 전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전략적 장소일 뿐입니다. 여기서 개인의 이상과 제국의 이해관계는 필연적으로 충돌합니다.
로렌스는 자신이 아랍인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에게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그의 역할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아랍 독립을 말하지만, 동시에 제국의 장교로서 명령을 수행합니다. 다시 말해, 로렌스의 이상은 제국주의 체계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이 모순을 직접적인 설명 대신 장면 구성과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드러냅니다.
특히 전쟁이 끝나갈 무렵,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아랍인들의 의견이 배제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사막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던 이들의 희생은 서류와 합의서 앞에서 쉽게 무시됩니다. 이때 로렌스는 자신이 믿어온 정의와 이상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영화는 제국주의를 단순히 비난하기보다, 그 구조 속에서 개인의 선의가 어떻게 소비되고 이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시선은 영웅 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감독은 로렌스를 통해 “선한 의도를 가진 개인이 제국주의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쉽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 자체가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의 균열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로렌스의 가장 큰 적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는 영국인도, 완전한 아랍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흰 아랍 복장은 처음에는 연대의 상징이었지만, 점차 그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로렌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로렌스의 심리 변화를 극적인 대사보다 침묵과 표정으로 표현합니다.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른 뒤 스스로를 두려워하는 장면들은, 영웅 서사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전쟁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전쟁에 의해 내면에서부터 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영웅을 이상화하지 않고, 인간의 취약함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정체성의 균열은 결국 로렌스를 고립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는 아랍인들에게는 외부인으로, 영국군에게는 지나치게 아랍화된 인물로 인식됩니다.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그는 영웅의 상징으로만 쓸모가 있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이 장면들은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문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은 한 번 어떤 역할이나 이미지로 알려지면, 그 모습대로 행동하길 계속 요구받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게 되었는지는 잘 보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에 맞게 행동하길 기대합니다. 로렌스 역시 ‘아랍의 영웅’이라는 상징이 되어버린 뒤, 그 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문제는 그 이미지가 더 이상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나의 모습과 다를 때 발생합니다. 겉으로는 모두가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정체성에 혼란이 오며 고통스러워집니다. 영화는 이런 상황이 결국 한 인간을 얼마나 심하게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이미 1960년대에, 사회가 만든 역할에 갇힌 개인이 겪게 되는 내면의 분열과 고독을 이 인물을 통해 미리 보여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영웅의 성공담이 아니라, 영웅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로렌스의 균열된 정체성은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구조적 비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