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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현기증 리뷰 : 집착에서 시작된 추적, 사랑, 진실

by cinema88 2026. 1. 22.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Vertigo, 1958)은 단순한 미스터리나 로맨스 영화로 분류하기에는 지나치게 복합적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고소공포증을 앓는 전직 형사 스코티를 중심으로, 한 여인을 추적하는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은 사건보다 인물의 심리 깊숙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집착으로 변질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현기증은 서스펜스의 외형을 빌려 인간 내면의 불안과 욕망을 해부하는 영화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영화 '현기증'의 포스터입니다.
영화 '현기증' 포스터

집착에서 시작된 추적

영화는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현직에서 물러난 형사 스코티가 옛 친구의 부탁을 받아 그의 아내 매들린을 미행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이 설정만 놓고 보면 흔한 추적극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치콕은 이 ‘추적’이라는 행위를 친구를 위한 호의가 아닌, 집착의 씨앗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스코티는 처음에는 관찰자의 위치에 머무르지만, 매들린의 기이한 행동과 신비로운 분위기에 점점 감정적으로 끌려들어 갑니다. 중요한 점은 이 집착이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녀를 계속 바라보는지, 왜 그녀의 과거와 행동에 매혹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빠져들어 갑니다.

히치콕은 추적 장면을 매우 느린 호흡으로 구성합니다. 자동차로 뒤를 쫓는 장면이나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은 긴장감보다는 반복성을 강조합니다. 이 반복은 관객에게도 일종의 ‘현기증’을 유발합니다. 같은 행동이 계속 이어지면서, 스코티의 시선에 관객 역시 동화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관객은 매들린이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스코티의 왜곡된 시선을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여기서 영화는 이미 추적극이 아닌 심리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만들어낸 환상

스코티가 매들린에게 느끼는 감정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환상에 대한 집착에 가깝습니다. 스코티는 매들린이라는 ‘사람’을 사랑한다기보다는, 그녀가 지닌 이미지와 분위기, 그리고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 속의 인물을 사랑합니다. 영화는 이를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매들린의 말과 행동은 항상 어딘가 비현실적이며, 스코티는 그 비현실성을 의심하기보다 오히려 더 깊이 매혹됩니다.

이 환상은 매들린의 죽음 이후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스코티는 죄책감과 상실감에 시달리며, 현실과 단절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후 주디를 만나면서 영화는 중요한 국면을 맞이합니다. 주디는 외형적으로 매들린과 닮았지만, 성격과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스코티는 주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주디를 매들린의 모습으로 ‘재구성’하려 합니다. 옷차림, 머리색, 행동까지 하나하나 통제하며, 과거의 환상을 현실로 되살리려 합니다.

이 과정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폭력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진짜 모습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치콕은 이 장면들을 통해 사랑이 언제든지 집착과 지배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감정의 이름이 무엇이든, 타인을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로만 대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영화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관객에게 강한 충격을 줍니다. 매들린이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조작된 존재였다는 사실, 그리고 스코티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대상이 철저히 연출된 환상이었다는 점은 영화 전체를 다시 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매들린이 조작된 인물이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코티가 진실을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어떻게 된 일이었는지 이해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 완전히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종탑 장면에서 스코티는 마침내 고소공포증을 극복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큽니다. 그는 물리적인 두려움을 이겨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진실로 이해하는 것에는 실패합니다. 진실은 드러났지만, 그것이 구원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히치콕은 여기서 매우 냉정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진실을 안다고 해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진실은 인간의 허약함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기증은 결국 한 남자의 비극을 넘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얼마나 쉽게 사로잡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 서사가 특정 시대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 환상, 그리고 진실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는 영화 속 이야기이자, 동시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으로 남습니다.